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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동견

자폐증

2004-09-25 12:25:29

여느때 보다 좀더 지친 모양이었다. 어떤 일에나 트러블이 있기 마련이고, 그나마 해결 못하고 돌아가는 발길은 무겁기만 하다

언제나처럼 록폰기 역에서, 언제나 타는 지하철 오오에도센을 탔으며, 그것은 여느때처럼 붐비지 않은 열차였다. 비교적 한산했으나, 올라타고 보니 앉을 만한 자리는 한 곳 뿐이었다. 개걸스럽지 않도록 비교적 천천한 걸음으로 그 자리에 다가갔으나, 마음은 결코 저 자릴 빼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피곤한 날은 스포츠 신문의 외설스런 기사 또한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애써 샀던 신문의 본전 생각을 하면서도 이내 눈을 감아보려 했다. 집까지는 40분이지만, 눈이라도 붙이고 나면 좀 낫겠지 하며..

막상 눈을 붙이려고 했더니, 바로 건너편 좌석에, 지하철 승객으로는 왠지 어색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나이는 30대 중반 쯤으로 보였으며, 얼굴색은 상당히 검은 구리빛, 눈은 동그란게 겁이 많아 보이게 생겼지만, 머리가 스포츠여서 전체적으로는 무서운 형님들을 연상키도 했다. 그러나, 이 정도라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모습이나..귀에는 연필을 각도 높게 꽂았으며, 무릎의 가방은 이상할 만큼 끓어 앉고 있었다. 이 모습이 기묘하게도 평범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하철을 타면, 평범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던가.. 그렇다고 계속 흥미를 가지고 볼 이유도 없었지만, 오늘의 이 친구는 어느 영화에서 많이 보았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자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이 친구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더미를 넘기기 시작했다. 종이 크기는 일반 A4의 4분의 1정도 되었고, 넘기는 속도는 딱 내 신경에 거슬릴만큼 빠른 속도였다.

어느 영화에서 보았던 그 모습은 점점 형상화되어가는 느낌이 들었으며, 어느새인가 상대방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그의 행동에 집중되었다.

자세히 보니 그 종이에는 여러 줄이 있었으며, 각 셀안에는 깨알같은 숫자가 써있었다. 처음엔 영화에서처럼 이 친구가 천재적인 능력을 갖은 사람으로 모든 페이지의 숫자를 읽어 내려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흥미가 깊어지면서 그의 행동의 패턴과 그가 읽고 있는 것들을 파악해 갈 수 있었다.

종이는 총 19장이었으며, 전체 행과 열을 다 읽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처음에 보는 줄과 다음번에 보는 줄 그 다음번에 보는 줄의 위치가 분명히 틀려 있었다. 더더욱이 종이와 눈사이가 상당히 가까웠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그정도는 쉽게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역과 역사이에 대략 19장의 종이를 3번을 읽어 내려갔다. 대략 한정거장이 2분이라고 생각했을때, 이친구는 한장 넘기는데 약 2초가 걸리며 그 동안에 한 줄을 모조리 읽는 것 같았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3번을 읽고 꼭 한번씩 귀에 꽂은 연필을 뽑아 숫자를 기입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의 숫자에 대한 가감상제의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단히 신중을 기하며 숫자를 기입했으며, 무엇인가와 대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몇번이나 계산을 했던 것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정확성을 판단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 흥미로운 친구의 행동 패턴을 내가 읽고 계산하면서 아무래도 어떤영화인지 감이 오면서도 딱히 이름과 배우 이름이 떠오르지 않음에 이상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친구가 자리 뜨면서 역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아! 막상 그 친구가 자릴 뜨고 나니 이상하게 밀려오는 허전함 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연민의 정마저도 느끼던 차에... 언제 어디가서나 잘 지내길 바라는 사이에.. 미끄러지듯 지하철을 출발을 하였고...건 너 창밖에 미친 초췌한 내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손은 19장의 종이를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