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방송되는 독도 문제. 한일 문제. 모른척하고 살아 왔지만,
'한국 사람은 어릴때부터 쇄뇌 교육을 받아, 이유도 모르고 독도는 지내 땅인줄 알아. 불쌍한 놈들'
이런 식의 역겨운 방송이 계속 되는 것을 보고. 가슴이 갑갑함을 느꼈다.
이 모든 아픔의 시작은 우리 힘으로 해방하지 못한 탓이요.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일본은 한국을 우습게 알기 때문이다.(우익을 포함한 많은 정치가들)
바른 역사를 가르키고 싶으면, 강해져야 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가들은 일본의 양아치 역사가들에게 지지 않도록 더더욱 공부해야한다.
노다야 고맙다. 너 때문에 공부 많이 한다. 노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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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도
일본애들 얘기
- 일본애들은 1905년 시마네현에 편입 했다. 그 때 왜 아무말도 안했냐.
- 1952년 센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는 일본땅으로 국제적 공인을 받았다.
- 그 후 한국이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웃기는 놈들.
- 1905년이면 이미 외교권을 다 뺏겨서, 독도가 아니고 대한제국이 다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 1952년 센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한 문구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다.
초안에서 거문도, 제주도, 울릉도, 독도를 일본은 포기한다라고 되어 있으나,
미국과 영국이 몇차례 안을 주고 받으며 최종적으로 독도 표기를 제외한다.
결국, 일본은 거문도, 제주도, 울릉도만 한국땅이니 독도는 일본땅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한다.
정확히 말해 연합국은 독도를 일본땅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고,
정할 수 없으니 보류한 것과 같은 것인데. 국제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2. 일본이 보는 역사
위키디피아를 보며, 숨이 몇차례 넘어 갈뻔 했으나, 참고 읽었다.
가슴에 피눈물이 흐르는 걸 참고 읽었다.
일본애들이 말하는 한일합방이란 이런 것이었다.
한국은 일본에 감사하여야 한다!!
중국의 종속국이었고. 어짜피 먹힐 운명이었고, 우리 나라 사람이 합병해달라고 간청한거고,
학교는 늘었고, 한국어를 필수로 가르켰고, 한글은 경멸했던건 니들이었고,
백정에게도 성을 주었고....
<한국병합편>
http://ja.wikipedia.org/wiki/%E9%9F%93%E5%9B%BD%E4%BD%B5%E5%90%88
이씨조선은 청나라를 중심으로 쇄국정책. 일본의 근대화 요청을 내정간섭으로 여기고, 침략의도로 여김.
러시아, 서구열강, 일본은 조선의 쇄국정책을 용인하지 않았고,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
일본은 어디까지나 자국주도의 정치개혁을 지향하였으나, 청나라는 쇄국하의 족속한다를 주장
동학 운동이 발발. 이를 기회로 청과 일본은 군대를 출병. 그리고 한국내에 주둔시킴.
1894년 청일 전쟁 발발. 청나라가 지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과의 조선의 종속국 관계를 청산 시킴.
그후.. 청, 러시아의 견제에서 자주국의 지위를 만들어 주기 위해 고종을 황제로 즉위 시키고 대한제국을 만들어 드림.
근데.. 국내외 간섭이 많아 독자적으로 독립국가를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이 보호국이 되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조선을 일본 영토로, 황국민으로 하려하나 질이 떨어지는 놈들이라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등박문은 반대파였는데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테러로 죽음을 당하자, 병합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대한제국 일진회가 한일 합병 요구 성명서를 상신함. 그내용은 아래와 같음.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대한제국을 지키기 위해 돈과 인명을 아끼지 않고
러일전쟁에서는 갑오의 20배나 희생하며 러시아에 먹히는 걸 도와주고, 동양전체의 평화를 지켜주었다.
한국은 감사도 하지 않으며, 이나라 저나라에 깝쭉대며 외교권을 뺏기고, 보호조약까지 오게 된건 완전 한국 우리 책임이다.
우리는 일왕께 간원하여, 조선인도 일본인과 같이 같은 국민으로 대우해주고, 정부와 사회를 발전시켜주길 바란다.'
1910년 내각의 결정에 따라 8월22일 이완용 수상이 한일합방에 조인한다.
신분해방: 인간으로 취급 받지 못했던 백정에게도 성을 갖도록 해드렸다. 학교에도 다니게 해드렸다.
양반들이 반대했으나 강제적으로 진압해 드렸다.
토지제도: 토지 조사 다 해드려서 근대적인 등기제도를 도입해드렸다.
교육문화정책: 합방전 100여개의 학교에서 1943년에는 4271개로 늘었다.
1911년 교육령을 공포해 한국어를 필수 과목으로 배우도록 했다.
한국말을 못쓰게 했다는 말도 있으나, 조선어를 과목으로 도입했다는 반론도 있다.
한국어는 열등문자로 경멸했고, 그다지 쓰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