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つぶやき

이순신(위키피디아-일본)의 명량해전은 패배?였다.

읽기 전에.. 오해를 말아주세요.

하도 쌍욕을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수정합니다.

아래의 글은.. 객관적인 글이 아닙니다.

일본 위키피디아의 원문을 번역했을 뿐입니다.

위키피디아가 뭔지 모르시는 애국자들께서 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랫글은 일본 위키피디아의 원문입니다.

 

한일 합방, 을미사변... 등등을

번역 해서 올리다면... 대한민국의 주적이 될지도 몰라서...

다시는 역사를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일본의 역사관이 어떤지를 봐야..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있습니다.

 

맹목적인 애국은 훌륭하지만.. 그닥 어렵지도 않은 일입니다.

정말 필요한 애국은.. 공부하고 이론적으로도 충분해서..

상대방도 설득/납득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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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보는 이순신은 위대했는가?

명량이라는 영화가 대히트 하고 있다는데,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명량해전은 일본이 이긴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400년전 일이지만, 이렇게도 양국의 의견차이가 있다


http://ja.wikipedia.org/wiki/%E6%9D%8E%E8%88%9C%E8%87%A3



<임진왜란 전>

- 영의정 유성룡과 어린시절 친했음

- 여진과 접전중이던 함경도에서.. 상사 이일과 사이가 좋지 못해, 파면 당하고 백의종군함

- 그의 재능을 높게 산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발탁하여 전라도 각지에서 군관을 역임

- 임진왜란 전해인 1591년.. 친구 유성룡(당시 우의정)의 추천으로 전라도 수군 절도사에 대발탁됨!

- 공적 없는 이순신의 발탁은, 당시 여진과의 전투에서 공적이 있던 원균 등에 심한 반감을 사게 됨


<임진왜란>

- 1952년 4월 임진왜란 발생 이후, 경상도의 수군은 파괴 하였으나, 이순신은 잔존하는 수군을 모아

   수차례, 일본선을 격파했다 (옥포해전 등)

- 7월에 들어, 카토, 와키사카 등이 수군을 모아, 이순신에 대항하고 하고자 했음

   이순신은 한산도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단독 행동중인 와키사카를 꼬여 격파함

   그 후 와키사카를 지원하기 위해 안골포에 정박해 있던 카토의 수군을 격파

- 수송선이었던 일본 수군의 배에 이 때부터 대포를 부설해으며, 해안선에서도 대포를 설치하여 협공함

-> 이후, 이순신의 부산포 공격, 웅천공격 등은 피해만 발생하고, 출전 횟수가 격하게 줄어듬


<휴전기>

- 1593년, 그간의 공적으로 이순신은 조선남부 수군의 지휘관으로 출세함

- 이에 갑자기 부하가 된 원균은 부임지를 바꿔달라고 조정에 청원 했으며,

   이순신과 서로 폭언을 하는 등 불화가 심각해 짐. 이순신은 일기에서 

    ' 천지간 원균처럼 흉악하고 상식에 벗어난 사람은 없다'고 썻다

- 1954년, 휴전 교섭기에 이순신은 거제도를 격파 했으나, 일본은 해전에 응하지 않고

   포대를 설치 하였다.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명나라는 평화 교섭에 방해 된다고 교전을 금지했다.

- 같은 해 9월, 10월에 다시 거제도를 공격해왔으나, 일본은 공격에 응하지 않고 침작하게 대응했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대립이 일어나, 이순신이 해전에서 공을 세우려 서두르고 있다며,

   비판하고 이원익을 보내 감사를 받게 했음. 이순신은 유임 되었으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짐


<정유재란>

- 그 후 전투는 잠잠해졌고, 97년 정유재란시 카토가 도착하는걸 코니시측이 조선에 알려줌

   이에, 조정에서는 카토를 공격하라고 이순신에게 명령함

- 이순신은 일본의 수작으로 보고, 단독 판단으로 공격을 하지 않음

- 이것을 항명이라 하여, 이순신은 고문을 받고 일단 사형을 선고 받음. 이후 백의 종군의 기회를 얻음


- 이순신의 후임인 원균은 수군 단독의 공격을 꺼려했으나 실행했고, 염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원균을 비롯한 장수가 대다수 죽고 조선 수군은 거의 괴멸 하였다

- 이순신이 재임되었을시 배는 판옥선 12척 뿐이었음

  일본군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점령해가던 중, 잔존 수군을 수습하여 퇴각하던 이순신은  

  물살이 빠른 명량해협으로 일본 수군을 유도, 해협에 돌입한 일부 일본 수군이 격파 됨

  그러나, 이순신은 후속 병력에 압도되어 명량해협을 포기하고 그 날 밤 퇴각함.

- 일본군은 계속 밀고 나갔고, 정박지를 잃은 이순신은 전라도 북단까지 후퇴함

- 일본군은 원래계획을 모두 달성하고, 조선 남부 지방에 위성군을 설치하고 전선을 뒤로 밀게 됨

- 이 때,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과 함께 밀고 내려와 고금도에 거점을 마련함

- 58년 7월, 명수군이 오자 이순신은 그 배하에 족속하게 됨

- 9월에 명군과 함께 순천을 공격했으나, 10월까지 막대한 손해만 입고, 이순신은 해상 봉쇄를 풀고

   고금도로 후퇴함

- 토요토미 사망후, 코니시는 명과 강화를 맺고 퇴각하려 했으나, 이를 안 명/조선 수군은 봉쇄를 풀지 않고

  코니시가 퇴각하는 걸 막았다.

- 이에, 명나라에 항의하여 명수군은 빠졌으나, 이순신은 거절함

- 이에 일본은 시마쯔 등 장수들이 급거 수군을 편성하여 구원하게 됨

- 이순신은 이것을 알고, 명/조선 수군은 순천 봉쇄를 풀고, 시마쯔 수군을 노량 해협에서 맞게 됨

- 노량 해전은 길어졌고, 명/조선군과 일본군 쌍방의 피해가 커짐.

- 이순신은 일본의 총을 맞고 숨졌으며, 코니시는 당초의 계획대로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 이순신의 최후 > 

- 한국에서는 대패한 일본군을 추격 중에... 유탄을 맞고... 라고 되어 있으나 역사적 근거는 없음

- 추격이라는 것은 유성룡의 징비록에나와 있을뿐임

- 다른 한국 자료 난중잡록에는 해전이 시작되고 일본 수군은 관음포로 일시 후퇴하고 있었고

  이때 일본배 후미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일제 사격을 하여 이순신을 죽였다고 되어 있다

- 명나라 기록에는 명의 등자룡을 구하려다 죽었다. 일본 자료 정한록에는 작은배로 출정한

   등자룡을 구원하려 했으나, 일본군에 둘러 싸여 죽게 되었다 등이 남아 있음

- 한국에서는 영웅화를 너무 한 나머지 스스로 죽었다라는 설, 전쟁에서 살아남아 전쟁후 죽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근거 자료는 없음


<평가>

- 원래, 명, 조선, 일본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인물은 아니었음

- 명치유신후 정한론이 대두 되는 시점에 일본, 한국 문학자 연구자에 의해 재평가 됨

-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영웅화 시작함. 임시정부의 일부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평가를 계승함


<속설과 오해>

- 일본군의 보급 부족을 이순신이 보급로 차단이라는 해석이 많았지만, 큐슈~부산까지의 

   보급로가 막힌 것도 아니고, 전 기간동안 물자, 인력의 공급은 안정적이었음

- 일본군의 식량 부족은 예상보다 약했던 조선군의 탓으로, 한 순간에 조선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보급로가 예상보다 길어졌고, 현지의 식량 부족으로 조달의 어려웠기 때문임.

- 이 또한, 53년 주력군 남하와 일본 본토에서의 보급 개시로 해결함

- 자주 거북선이 거론되나, 증명할 자료는 없음

- 토고 헤이하찌로가 이순신을 존경한다는 발언이 있으나, 공공의 자리에서 그런말 한 적 없음

  그의 한국인 지인인 이영개의 발언을 제3자가 듣고 전개한 것으로 역사적 근거 없음





참.. 필요한 것들만 잘 모아서 매우 객관적인 것처럼

정리하느라 시간 많이 들였겠다.


그래.. 그렇지.. 조선은 '이씨'의 조선이고

미개한 조선을 일본이 가르킨거고(학교 세워 드림)

기껏 철도 깔아주고, 사용도 안하던 한글도 살려서 가르켜 드렸고

공장 만들어 드리고 근대화 시켜줬는데.. 

맨날 불만만 말하는 한국인게지...

어느 세월에 좋아 질고...피곤할 뿐이네...